굳은 표정으로 기자회견장에 들어선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단상 옆에서 약 5초간 길게 허리를 숙였다. 긴장한 듯 바로 준비한 사과문을 읽지 못하고 머뭇하며 숨을 들이쉬기도 했다.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다"고 입을 뗀 신 회장은 다시 한번 단상 옆으로 나가 깊이, 그리고 길게 허리를 숙였다. 200여 명의 취재진이 몰린 소공동 롯데호텔 기자회견장은 신 회장이 고개를 들 때마다 카메라 셔터 소리로 가득찼다.
신 회장은 호텔롯데 상장 계획과 연말까지 남아있는 순환출자의 80%를 해소하겠다는 약속, 장기적으로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겠다는 전향적 조치들은 준비한 원고대로 담담히 읽어 내려갔다. 한국 롯데가 우리나라 기업이라는 메시지, 롯데그룹을 지배하는 L 투자회사에 대한 해명 역시 어눌한 한국어 발음이지만 틀린 부분을 고쳐 가며 열심히 읽어갔다.
질의응답 부문은 당초 예정에 없었음에도 질문한 기자를 응시하며 침착히 대답했다. 원론적 답변에 가까웠지만 형 신동주 전 일본롯데홀딩스 부회장과의 경영권 분쟁에서 타협할 여지가 없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하는 등 강약을 조절하는 노련함을 보이기도 했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사과문만 발표할 경우 오히려 역풍이 불 수 있다는 지적에 따라 기자회견 전 급하게 질문사항을 정리해 올렸는데, 현장에서 회장님이 무리 없이 소화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사실상 장남의 편에 선 것으로 보이는 부친 신격호 총괄회장의 의중을 묻는 질문에 신 회장은 "저는 아버님을 많이 존경하고 있다"고만 짤막하게 답했다. 표정 변화는 크게 없었지만 사실상 동문서답, 더 정확히는 답변을 피한 것이다. 골육상쟁으로 비화된 가족 간 분쟁과는 선을 긋고 그룹의 리더이자 경영자에 모든 행보의 초점을 맞추겠다는 전략이다.
약 20분간 사과문 발표부터 질의응답까지 모두 마친 신 회장은 예의 길게 허리 숙이는 인사를 한 뒤 기자회견장을 나섰다. 지난 3일 신 회장이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할 때처럼 기자들이 따라나가고, 그래서 격투씬을 방불케 하는 취재진 간 몸싸움은 벌어지지 않았다. 현장 취재진 사이에서는 신 회장이 기존보다 진전된 내용을 사과문에 담고 질의응답에도 원고도 없이 나름대로 성실히 임했다는 평가들이 많았다.
다만 '듣기가 일'인 기자들이 정돈된 회견장에서 갖춰진 음향시설을 통해 입장을 듣는 것임에도 고개를 갸웃할 때가 많았다. 일본식 발음이 정확하게 전달이 되지 않다보니 근처에 앉은 기자들끼리 신 회장이 사용한 어휘를 서로 체크하는 일이 계속 벌어졌다. 이후 롯데그룹 측에서 질의응답 부분을 따로 녹취를 풀어 취재진에게 제공한 것도 이때문이다.
신 회장은 곧바로 집무실로 올라가 평소대로 경영활동을 이어갔다고 한다. 내부적으로는 입장을 설명할 기회이되 반롯데 정서를 되돌리기엔 여전히 부족하다고 본다. 오는 17일 예정된 일본 롯데홀딩스 주주총회가 전근대적 경영의 민낯을 드러낸, 그리고 '롯데시네마'로 희화화된 롯데그룹 후계 분쟁의 절정을 장식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