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적으로 온갖 자산이 다 폭등해서 “돈이 돈이 아니다” “화폐가치 폭락”을 말하는 전문가들이 많습니다만 베네수엘라에 비하면 약과입니다.
여기는 지금 숨만 쉬어도 물가가 오릅니다.
2퍼센트만 넘어도 걱정인 물가상승률이 수 천, 수 만 퍼센트. ‘돈’을 찍어낼 ‘돈’이 없어서 지폐에 적힌 0을 백만 개씩 빼겠다, 계획 중입니다.
무엇이 세계 원유매장량 1위 국가를 가난의 극단으로 내몰았나. 세계를 보다에서 답을 찾아봅니다.
강은아 기자입니다.
[리포트]
탱크들이 줄줄이 지나가고 총을 든 군인들이 열을 맞춰 행진합니다.
스페인 독립 210주년을 기념해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열병식이 열렸습니다.
국가의 힘을 과시하는 행사지만 베네수엘라의 경제 사정은 최악입니다.
산더미 같이 쌓인 돈 더미 위로 어린 아이가 뛰어들어 장난치고 심지어 쓰레기 통 안에도 돈 다발이 흩어져 있습니다.
상인들은 돈을 딱지처럼 접어 핸드백을 만들어 팔거나, 그림을 그리는 종이로 활용합니다.
베네수엘라 상황은 이른바 초 인플레이션.
지난 2016년 550%였던 물가상승률은 2017년 2,600%로 치솟더니 2018년엔 169만%로 정점을 찍었습니다.
이후 안정을 되찾은 게 7천300%, 3천700%입니다.
제가 들고 있는 것이 베네수엘라 화폐, 볼리바르인데요.
다 합치면 40만 볼리바르, 큰 돈 같지만 미국 달러로 환산하면 12.4센트, 우리돈 140원 정도입니다.
그렇다보니 돈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시장에선 대부분 미국 달러만 씁니다.
[현장음]
"이게 얼마에요?" "2달러 50센트요."
[현장음]
"이 만큼의 물고기가 지금 12달러 쯤 되네요, 12달러"
마트 역시 마찬가집니다.
[현장음]
"이렇게 결제를 하면 달러하고 볼리바르가 같이 (계산돼) 나옵니다."
우리 돈 2만원, 18달러로 장을 봤는데 베네수엘라 돈으로 따지면 5900만 볼리바르에 달합니다.
새 돈을 찍어낼 돈이 부족한 상황에 이르자, 베네수엘라 정부는 다음 달 화폐단위에서 '0'을 여섯 개나 빼는 100만 대 1 화폐 개혁에 나섭니다.
쉽게 말해 100만 원이 1원이 되는 겁니다.
석유 매장량 세계 1위 자원부국 베네수엘라는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국제유가는 최근 몇 년간 떨어지는데도 좌파 정권은 무상 토지 등 포퓰리즘 정책을 일삼았고, 국가 재정이 바닥나자
화폐를 무한정 찍어냈습니다.
[니콜라스 마두로 / 베네수엘라 대통령(2019년)]
"사회주의 건설과 경제·사회 번영을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합니다."
정부 정책 탓에 기업들은 근로자들이 일을 안 해도 월급을 줘야 합니다.
[장숭아 / 베네수엘라 교민(사업가)]
"기본급(한달 월급)은 정말 3달러? (코로나 이후에는) 일을 못 나와도 월급을 계속 주고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이 어려워졌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의 30%는 인접국가로 떠나버렸고, 남은 인구의 90%는 빈곤층으로 전락했습니다.
[장숭아 / 베네수엘라 교민(사업가)]
식당하다보니 또 어떤 일이 있냐 전구를 빼가요. 전구를 자꾸 빼가가지고 따로 그런 뭐라고 해야하지 페이스북 이런데 올려서 팔고요. 또 전선을 끊어가요. 전선같은 전화선 이런게 빼가고 안테나 빼가고. 그래서 전선 끊다가 죽은 사람도 많아요. 감전되가지고.
땅속에 원유는 묻혀있지만, 국유화된 석유회사의 생산성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습니다.
[손혜현 / 국립외교원 중남미 전공 교수]
"(베네수엘라 주 산업인) 석유산업이란 것이 재투자가 필요한데 미국의 경제제재까지 강화되고 있는 상황이어서 현재로서 경제난을 극복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없는 거죠."
석유에 의존하다 성장이 멈춰버린 경제, 퍼주기가 일상이 되어버린 무상복지는 베네수엘라 화폐를 '가치 없는 마천루'로 만들었습니다.
세계를 보다, 강은아입니다.
영상편집: 변은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