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아들로 그룹을 물려 받은 이건희 회장은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냈습니다.
중요한 국면마다 어떻게 승부사 기질을 발휘했는지. 김철중 기자가 주요 장면을 돌아 봤습니다.
[리포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삼성그룹 부회장에 오른 건 지난 1979년.
삼남인 이건희 회장이 첫째형 맹희, 둘째형 창희 씨를 제치고 삼성그룹의 후계자로 임명된 겁니다
45세의 나이로 회장에 취임한 뒤에는 곧바로 삼성 그룹의 체질 개선에 돌입합니다.
[이건희 / 삼성전자 회장(1988년)]
"제2의 창업을 엄숙히 선언합니다. 그것은 삼성의 체질을 더욱 굳세게 다지어 세계 초일류기업으로 키워나가고…"
당시 삼성은 미국, 일본 회사의 제품을 모방하기에 급급한 '추격자' 처지였습니다.
삼성전자 공장에서 작업자가 불량 부품을 칼로 대충 깎아 완성품을 조립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이건희 / 삼성전자 회장(독일 프랑크푸르트, 1993년 6월)]
"(회장이 되고) 만 5년 몇 개월간 계속 불량 안 된다 (얘기했는데…). 모든 것을 양을 지양하고 질을 향해라."
이 회장은 삼성 임직원들을 향해 뼈를 깎는 변화를 주문합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임직원을 상대로 한 '신경영 선언'은
국내 시장에 안주해 온 타성을 벗어 던지고
세계 무대에서의 경쟁력을 길러야 한다는 절박함이 배경이 됐습니다.
[이건희 / 삼성전자 회장(독일 프랑크푸르트, 1993년 6월)]
"바꾸려면 철저히 바꿔. 극단적으로 얘기해. 농담이 아니야. 마누라와 자식 빼놓고 다 바꿔봐."
초일류 품질이라는 포기할 수 없는 목표를 위해 '휴대전화 화형식'이라는 충격요법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1995년 삼성전자 구미사업장에서 임직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량 휴대전화 10만대 등을 불태우게 한 겁니다.
최고가 아니면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메시지를 새기려는 의도였습니다.
96년에 일찌감치 기업의 미래 경쟁력으로 디자인을 꼽고 마케킹과 브랜드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디자인 혁명에 나섰습니다.
2008년 삼성특검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가 2010년 복귀한 뒤에는
삼성의 미래를 구상하는 데 몰두했습니다.
앞서가는 일본과 뒤쫓아오는 중국 틈에서 샌드위치가 될 수 있다는 위기 의식은
조직 전체에 끊임없는 혁신 요구로 이어졌습니다.
[이건희 / 삼성전자 회장(2013년 5월)
"항상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 거기서 더 열심히 뛰고 더 사물을 깊게 보고, 멀리 보고 연구해야 된다."
혁신 없이는 도태되고 만다는 경영 철학과
위기 때면 어김없이 발휘된 이 회장의 '승부사 기질'이
오늘날 삼성을 세계 최고 기업의 반열에 올려놨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채널A 뉴스 김철중입니다.
[email protected] 영상편집: 김지균